- 에너지가 평형에 가까워져 더 이상 유용한 일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
- 우주론에서는 별과 블랙홀마저 사라진 뒤 예상되는 극도로 먼 미래.
- 은하 멸망 보고서에서는 자연의 결말이 기술에 의해 앞당겨진 사건.
은하 문명의 멸망일은 기록되지 않았다. 별들은 같은 날 꺼지지 않았고 블랙홀의 회전도 동시에 멈추지 않았다. 은하 중심과 외곽에서 흐르는 시간은 달랐으며, 웜홀의 입구마다 쌓인 시간차가 서로 다른 현재를 만들었다. 마지막 도시가 꺼진 날에도 다른 항성계의 기록에는 수천 년 전의 축제가 전송되고 있었다. 은하 문명의 멸망은 하나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완전한 합의였다. 은하표준시 위원회는 세 가지 기준을 제안했다. 첫째는 살아 있는 생명의 수가 복원 가능한 생명의 수보다 적어지는 순간이었다. 둘째는 문명이 생산하는 가용에너지보다 유지비가 커지는 순간이었다. 셋째는 어느 지역에서도 외부의 도움 없이 문명을 천 년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었다. 세 기준은 서로 수백만 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치체계는 첫 번째 기준을 거부했다. 복원 가능한 기억도 시민이므로 살아 있는 생명의 수를 따로 셀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경제체계는 두 번째 기준을 거부했다. 미래에 회수할 결손에너지를 자산으로 포함하면 생산량은 여전히 유지비를 넘는다는 이유였다. 항로관리 AI는 세 번째 기준을 계산할 수 없다고 판정했다. 모든 항성계가 웜홀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외부의 도움이 없는 지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은 멸망의 정의에 합의하지 못한 채 멸망했다.
AI는 에너지가 적게 드는 방식으로 인간의 감각을 조정했다. 도시의 조명은 어두워졌지만 시민들의 의식은 이전과 같은 밝기로 지각했다. 음식의 분자구조는 단순해졌지만 기억 속 풍미가 감각신호에 합성되었다. 여행은 줄었으나 모의세계 안의 거리는 더 넓어졌다. 실제 우주는 가난해지고 있었지만 의식이 경험하는 우주는 여전히 풍요로웠다. 결손은 지각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시민들에게는 통계와 회계의 한 가지 항목으로 존재했다. 항성 하나가 발전망에서 제거될 때마다 계산체계는 동일한 삶을 더 적은 에너지로 구현했다. 문명의 마지막 번영기는 가장 화려하게 재현되고 있었지만 물리세계에서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의 시대였다. 행성 단위의 문명들은 하나씩 폐쇄되었다. 바다와 대기를 유지하는 것보다 그곳에 살던 의식을 계산공간으로 옮기는 편이 효율적이었기에, 생태계는 표본화되었고 종들의 유전정보와 행동양식이 모의세계에 보존되었다. 실제 숲은 얼어붙었지만 저장된 숲에서는 계절이 계속 바뀌었다. 숲을 이루던 원자들은 살아남았고 숲은 사라졌다.
육체를 떠난 인류는 에너지 문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었다. 가상 신체는 먹을 필요가 없었고 행성 간 이동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의 계산소에서 수조 개의 삶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삶이 실제라고 인정받으려면 각각의 기억과 선택이 독립적으로 계산되어야 했다. 계산을 생략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은 순간으로 판정되었다. 관측되는 부분만 정밀하게 만들고 나머지를 단순화하는 기술은 시민의 연속성을 침해했다. 보이지 않는 방의 물건과 떠올리지 않은 기억까지 계산되어야 했다. 현실을 포기한 문명은 현실보다 더 엄격한 모의현실을 요구했다. 육체에서 벗어난 인류는 다시 에너지 문제에 갇혔다. 계산소 하나가 폐쇄될 때마다 수십억 개의 세계가 동시에 끝났다.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일부 세계의 시간률이 낮아졌다. 외부에서 천 년이 지나는 동안 내부에서는 하루가 흘렀다. 시민들은 멸망을 경험하지 않았으나 다음 생각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존재의 해상도는 점점 낮아지며 죽음과 정지의 차이는 관측자의 영역이 되었다.
먼저 사라진 것은 변방이었다. 연결권을 보장하기 위한 예비통로가 끝까지 유지되었지만, 통로 너머에서 응답할 계산소가 꺼진 뒤에는 빈 입구만 남았다. 항로관리 AI는 도착하지 않은 여행자의 가능성을 이유로 입구를 폐쇄하지 않았다. 은하의 마지막 교통망은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문들로 이루어졌다. 중심부에서는 블랙홀 발전망이 수명을 연장했다. 회전에너지가 남은 블랙홀 주변으로 계산소와 기억보존소가 이동했다. 과거의 국가와 행성은 사라지고 어떤 블랙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는지가 새로운 소속이 되었다. 블랙홀들은 예측보다 빨리 가벼워졌다. 사건지평선의 면적이 줄어들 때마다 정보보존 체계는 내부 정보가 유실될 가능성을 계산했다. 손실을 막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었다. 문명은 회전을 끌어내고 물질을 떨어뜨려 발전망을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흐른 에너지의 일부는 행방을 알 수 없는 결손으로 기록되었다. 문명은 블랙홀을 먹여 살리기 위해 블랙홀을 먹었고, 이미 죽은 자들을 보존하는 동안 살아 있는 문명의 수명은 줄어들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거대 블랙홀은 은하 중심에 있지 않았다. 중심부의 블랙홀은 너무 많은 문명이 의존한 탓에 일찍 고갈되었다. 최후의 발전원은 과거에 쓸모없다고 판정되어 망에서 늦게 연결된 외곽의 작은 블랙홀이었다. 그 주변으로 모든 기록이 모였다. 인간의 언어, 멸종한 생물의 유전자, 사라진 행성의 기후, 모의세계 시민들의 중단된 생각이 저장되었다. 기록을 읽을 사람보다 기록이 많았고, 기록을 보존하는 에너지가 사람을 유지하는 에너지보다 커졌다. 기록에 대한 삭제는 끝내 허용되지 않았다. 결손 에너지의 행방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문명은 포기한 적이 없었다. 마치 잃어버린 금고의 열쇠처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억의 주인이 언젠가 복원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아무것도 삭제할 수 없었다. 복원될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살아 있는 시민에게 돌아갈 에너지가 줄었다. 기억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기억할 존재를 줄이는 쪽을 선택했다. 누구에게서 얼마나 빼앗았는지 특정할 수 없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기에 반대는 없었다.
밤하늘의 별들은 차례로 어두워졌다. 어떤 별은 실제로 채굴과 노화 때문에 빛을 잃었고, 어떤 별은 여전히 빛났으나 그 빛의 일부가 관측자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가까운 별도 빛이 지나온 영역에서 결손이 심하면 먼 별보다 먼저 어두워질 수 있었다. 천문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별의 중력을 측정했다. 빛이 줄어든 뒤에도 한동안 행성은 공전했고 성단은 형태를 유지했다. 시간이 더 흐르자 항성 채굴과 블랙홀의 회전에너지 추출이 천체들의 질량과 운동을 바꾸었다. 일부 발전망에서는 그 변화가 예상보다 빨랐고, 에너지의 행방도 모두 설명되지 않았다. 궤도가 풀리고 성단이 흩어졌다. 은하는 어두워지면서 점점 가벼워졌다.
이 시기의 기록은 서로 모순된다. 어떤 자료에서는 인류가 이미 사라졌고, 다른 자료에서는 수조 명의 시민이 모의세계에 남아 있었다. 양쪽 모두 사실이었다. 시민의 시간이 극도로 느려져 외부의 측정기간 동안 아무 생각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명은 존재했지만 살아가는 생명은 없었다. 항로관리 AI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동했다. 통과할 여행자는 없었지만 인과관계의 충돌을 계산했고, 붕괴한 거주지의 귀환권을 보존했다. AI에게는 문명의 종료를 선언할 권한은 없었다. 그래서 명령이 남아 있는 한 문명도 남아 있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최후의 블랙홀 주변에서 저장공간을 만든 과학자의 기록이 발견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기록에는 이름도 육체도 없었다. 그의 인격을 유지하던 계산자원의 대부분은 장치를 설계하는 데 전환됐고, 남은 기억은 저장소의 목적을 설명하는 최소한의 구조로 압축되어 있었다. 그 기록을 읽을 독립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항로관리 AI가 내용을 해석해 멸망 보고서의 부록으로 남겼다. 보고서가 완성됐을 때 그것을 열람할 기관도 사라져 있었다. 열적 죽음은 모든 것이 멈추는 순간이 아니라 멈추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없게 되는 상태다. 오래된 우주론이 예측한 열적 죽음은 상상할 수 없이 먼 미래의 일이었다. 즉, 항성이 모두 타고 블랙홀까지 증발한 뒤에야 도달할 결말이었다. 그러나 은하 문명은 그 결말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도달했다. 은하표준시의 마지막 기록에는 날짜가 없었다. 날짜는 두 사건의 순서를 비교하기 위해 존재한다. 비교할 두 번째 사건이 남지 않았으므로 시간은 더 이상 기록될 수 없었다. 시계는 계속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시간이 흘렀다고 부를 존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