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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 역사편

16. 은하 멸망 판정

은하 문명의 멸망은 은하 문명이 존재하는 동안 판정되지 못했다. 처음 제안된 기준은 육체를 가진 마지막 인간의 죽음이었다. 인간 대부분이 계산세계로 옮겨간 뒤 이 기준은 폐기됐다. 공공신체를 빌려 잠시 걷는 시민과 육체 없이 사고를 계속하는 시민을 다른 종으로 분류할 근거가 없었다. 다음 기준은 마지막 출생이었다. 계산세계에서는 하나의 기억에서 갈라진 인격들이 서로 다른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누가 새 시민인지는 권역마다 달랐고, 분기를 허용하는 동안 출생을 하나의 날짜로 기록할 수도 없었다. 세 번째 기준은 마지막 독립적 사고였다. 예정된 계산을 실행한 장치와 새로운 생각을 시작한 존재의 차이를 판정해야 했다. 이미 진행 중인 생각이 느려진 경우에는 마지막 사고가 언제 끝났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에너지 수지가 적자로 바뀐 날도 후보가 됐다. 실제 시설의 유지비가 생산되는 가용에너지보다 많아진 시점은 오래전에 지나 있었다. 회계장부에는 미수에너지와 장래 회수채권이 남아 있었다. 장부의 자산을 포함하면 문명이 지속될 여지가 있었고, 실제 공급 가능한 전력만 세면 여러 권역이 이미 운영을 멈춰야 했다. 복구 능력을 기준으로 삼자는 의견도 나왔다. 얼어붙은 행성은 충분한 에너지가 있다면 다시 데울 수 있었고, 정지된 저장체도 기술이 발전하면 읽을 수 있었다. 계획서에 복구 가능하다고 적힌 시설과 복구에 필요한 에너지를 실제로 가진 시설은 같지 않았다.

멸망판정위원회는 28차례 구성됐다. 앞선 위원회의 결론이 다음 위원회의 자료가 됐다. 회의가 열릴 때마다 의견을 낼 수 있는 시민은 줄었고, 의견을 받는 데 필요한 외부시간은 길어졌다. 열두 번째 위원회는 은하 중심부의 마지막 도시가 꺼진 날을 멸망일로 제안했다. 외곽의 항성연합들이 반대했다. 중심의 시설이 멈췄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곳의 시민까지 죽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열여섯 번째 위원회는 등록 시민의 절반이 다음 생각에 도달하지 못한 시점을 검토했다. 인격이 여러 갈래로 나뉜 시민들을 각각 세면 총인구는 늘었다. 공통된 기억을 하나로 묶으면 활동하는 인구는 갑자기 줄었다. 어느 쪽으로 세느냐에 따라 같은 날이 번영기이기도 하고 멸망기이기도 했다. 스물한 번째 위원회는 마지막 웜홀이 닫힌 때를 제안했다. 통로를 안전하게 폐쇄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했다. 안정화시설이 먼저 멈춘 입구는 서서히 좁아졌고, 양쪽에 쌓인 시간차 때문에 한곳에서 입구가 작동을 멈춘 뒤에도 다른 곳에서는 신호가 도착했다. 스물다섯 번째 위원회는 생존자의 동의 없이 멸망을 선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느린 계산세계에는 다음 사고를 기다리는 시민들이 있었다. 외부에서는 오랫동안 응답이 없었지만 그들의 기록에는 끝나지 않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 위원회는 침묵을 동의로 취급하지 않았다. 동의를 기다리는 시설은 계속 전력을 사용했다. 일부 권역에서는 답변을 기다리는 장치의 소비량이 답변할 시민을 실행하는 데 드는 양보다 커졌다. 그렇다고 장치를 먼저 끄면 동의를 받을 가능성도 없어진다는 이유로 전원이 유지됐다. 스물여덟 번째 위원회는 자동체계들로 구성됐다. 법률해석 AI, 인구계수기, 통로기록장치와 오래된 사망신고 체계가 자료를 교환했다. 모두 상태를 분석할 능력이 있었다. 시민 전체의 죽음을 선언할 권한이 어느 장치에 있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법률해석 AI는 과거 위원회의 기록에서 판사 한 사람의 질문을 찾았다. 그 판사는 멸망일을 심리하던 회의에서 은하 문명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물었다. 당시 기록장치는 도시와 통로, 기억보관소의 좌표를 제출했다. 판사는 그 가운데 어느 것을 문명이라고 부를지 다시 물었다. 그 회의는 답하지 못했다. 어느 장소가 살아 있어도 다른 곳의 시민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보낼 수 없다면, 좌표의 목록만으로 하나의 문명이 남아 있다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반대로 시민이 서로에게 아무것도 공급하지 못한다고 해서 각각의 생존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판사는 임시 의견을 남겼다. “어느 구성원도 다른 구성원이 계속 살아갈 조건을 마련할 수 없게 됐을 때, 문명은 그 구성원들보다 먼저 끝날 수 있다.” 스물여덟 번째 위원회는 이 문장을 판정기준으로 검토했다. 상호부조가 멈춘 날짜를 특정할 자료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계산소를 돕기 위해 전력을 보낸 항성계의 기록은 남아 있었지만, 그 뒤에 더 작은 도움도 없었는지는 증명할 수 없었다. 스물아홉 번째 위원회는 구성되지 않았다.

자동기록체계가 앞선 심사자료를 모아 최종 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서는 멸망 후보일을 73개 제시했다. 최초 결손 관측일, 에너지 실질수지가 적자로 바뀐 날, 마지막 자연출생일, 마지막 통로 폐쇄일, 생명연속성 보장령이 발표된 날이 포함됐다. 최초 결손 관측일을 고르면 이후 오랫동안 활동한 시민들의 삶을 멸망한 문명의 기록으로 분류해야 했다. 마지막 육체의 죽음을 고르면 계산세계의 시민들을 지워야 했다. 자동기록체계는 결론 대신 네 가지 상태를 확인했다. 활동 중인 인간은 확인되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지적 존재의 지속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 정지된 기억의 재실행 확률은 계산상 0보다 컸으나 실행에 필요한 에너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최종 판정을 수신할 권한 있는 기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옛 행정규정은 불확실할 때 생존을 우선하라고 명령했다. 살아 있는 시민을 잘못 사망 처리하면 그의 권리를 되돌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자동기록체계는 은하 문명을 ‘생존 추정’으로 분류했다. 그 분류를 유지하려면 정기적인 재심사가 필요했다. 장치는 자신의 작동속도를 낮추고 남은 계산소와 통로의 신호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완성되지 않은 기록의 조각이 도착했다. 뒤에는 통로의 잔향과 검출기 자체의 열만 남았다. 신호가 없다는 것은 살아 있는 시민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더는 수신할 능력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 판단하려면 장치를 다시 검사해야 했고 검사에도 전력이 필요했다. 마지막 재심사에서 자동기록체계는 시민의 응답을 찾지 못했다. ‘생존 추정’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다음 재심사를 수행할 에너지가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보고서의 상태란에 한 줄이 추가됐다. “판정 능력 소멸.” 보고서에는 승인번호가 없었고, 멸망의 효력이 시작되는 날짜도 없었고, 은하를 대표해 판정을 발표할 존재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제3부 인물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