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소콜로프는 중앙항로안전원에서 열세 곳의 독립검증연구단을 관리했다. 그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모계 선조 가운데에는 초기 지구 문명에서 가장 먼저 대기권 밖으로 나간 우주비행사들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그 시대의 인간들이 지금 기준으로는 믿기 어려울 만큼 불완전하고 위험한 장비를 이용해 우주로 나갔다고 가르쳤다. 소콜로프는 그것을 무모함이 아니라 인간에게만 가능한 모험심과 도전정신이라고 배웠고, 평생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조상들의 진짜 가치는 무모함을 용기로 바꾸는 신중함에 있다고 가르쳤다. 그 영향으로 소콜로프는 우주항공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도 항로개척선 부함장 자리를 택하지 않았다. 대신 모두가 기피하던 중앙항로안전원으로 갔다. 개척선에 탑승한 동기들의 육체가 사고로 유실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는 마음 한편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그럴수록 항로관리에 더욱 신중해졌다. 그의 신중함은 언제나 승진과 포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독립검증연구단 단장으로 발탁됐고, 항로관리 AI 루시를 포함해 아무도 그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광자 결손 보고서가 들어왔을 때 결손으로 죽은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고, 웜홀 통로를 이용해 살아가는 시민은 수조 명이었다. 소콜로프는 숫자를 믿었지만 작은 숫자가 큰 공포를 만드는 광경도 여러 번 보았다. 그가 안전원에 입사한 첫해, 한 통로에서 미세진동 가능성이 보고된 적이 있었다. 언론은 ‘통로 붕괴 임박’이라고 보도했고 여행객들이 한꺼번에 빠져나오면서 실제 사고가 일어났다. 진동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 대피하다 죽은 사람은 열두 명이었다. 그 뒤 소콜로프는 사실을 빨리 알리는 일과 정확하게 알리는 일이 같지 않다고 믿었다. 제97외곽권의 후속 보고서에는 천억 번 가운데 일흔세 번, 광자 하나씩이 부족하다고 적혀 있었다. 통로 안전기준보다 수십억 배나 작은 값이었다. 결손이 계속 증가해도 당대 시민에게 위험해지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소콜로프는 그 시간을 고대 인도의 ‘겁’에 대입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다. 그러나 그의 신중함은 결국 독립검증연구단에 재검증을 지시하게 했다. 예산부서는 열세 곳의 연구단이 같은 중앙계산망을 사용하면 비용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소콜로프는 반대했지만 독립성이란 인적 구성과 연구장소가 다르면 충족된다는 행정해석이 내려왔다. 열세 곳의 연구단은 서로 다른 연구자가 같은 계산망을 이용해 같은 보정 절차를 수행했다. 결과도 같았다. 결손은 재현되지 않았다. 소콜로프는 재검증 프로젝트로 불필요한 예산을 낭비하고 권한을 과도하게 행사했다는 이유로 감사 대상이 됐다. 그는 해고와 감봉, 견책 같은 처분은 피했다. 대신 최종보고서에 결손이 재현되지 않았다고 기록해야 했다.
소콜로프는 최종보고서에 ‘결손 재현 불가. 재현 불가능성이 무결손의 근거일 수 없음’이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장기적인 추가관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위험등급은 ‘현재 영향 없음’으로 지정했다. 그 표현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의 보고서는 괘씸죄에 해당했고 자발적으로 제출한 사직서는 곧장 수리되었다. 하지만 소콜로프의 최종보고서는 이후 천삼백 년 동안 여러 기관의 근거가 됐다. 새로운 결손이 관측될 때마다 담당자는 소콜로프의 결론을 인용했다. 현재 영향이 없다는 문장은 서로 다른 현재를 거치며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남았다. 소콜로프는 자신의 보고서가 그렇게 오래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 보고서에 십 년마다 위험등급을 다시 검토하라는 조항을 넣었다. 행정체계는 검토할 때마다 지난 십 년간 직접 피해가 있었는지 확인했다. 직접 피해는 없었다. 등급은 유지됐다. 그의 사적인 기록에는 결손에 관한 문장이 거의 없다. 저녁식사의 염분을 줄여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 딸과의 통신이 늦어진 일, 연구단의 출장비를 둘러싼 불평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한 기록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광자 하나보다 출장비 한 건을 증명하는 일이 어렵다.’ 후대는 그것을 그의 냉소로 인용했다. 실제로는 회계부서에 보낸 불평이었다.
소콜로프는 안전원을 떠난 뒤에도 결손자료를 읽었다. 안전원의 후배들은 비공식적으로 그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는 그들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자료 해석에 따르면 수치는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지만 측정장비의 정밀도도 함께 개선되고 있었기에, 그는 에너지 결손의 증가가 우주의 변화인지 장비의 발전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썼다. 그는 끝까지 신중했다. 그의 신중함이 괘씸죄를 겪은 뒤의 소심함인지 혈통에서 물려받은 고지식함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의 장례식에서 동료들은 그가 불확실한 증거로 시민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중앙항로안전원은 뒤늦게 그의 이름으로 신중연구상을 만들었다. 첫 수상자는 광자 결손의 증가를 주장한 논문을 증거불충분으로 기각한 연구자였다. 소콜로프의 위험등급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판정된 것은 그가 죽은 뒤 수백 년이 지나서였다. 연구자들이 이미 존재하던 은하표준시로 여러 시대의 원자료를 다시 대조하자 결손의 방향과 증가가 분명해졌다. 후대 사람들은 왜 그가 진실을 감췄는지 물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자기가 확인한 만큼만 썼다. 은하 문명은 그의 정직한 문장을 방패로 삼아 스스로를 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