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와 나는 헤이그의 어느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제이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어제부터 마리화나를 꼭 한 대만 피워 보고 싶다며 계속 조르고 있다. 나 역시 호기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솔직히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겁쟁이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두려운 것은 마리화나가 한국에서 불법이라거나 한국 법이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그런 원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누가 뭐래도 마리화나는 마약이다. 이것이 문제다. 나는 해로운 것들에 쉽게 중독되는 타입의 인간이다. 그래서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까짓것 한번 해보지 뭐!” 이런 식으로 손을 댔다가 끊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 이미 벼랑 끝까지 몰린 낙오자 인생인데 여기에 마약 중독자 딱지까지 더할 형편은 아니다.
제이는 얼마 전 길고 지루한 이혼 소송을 끝냈다. 처음에는 합의 이혼을 할 생각이었는데 재산 분할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송까지 갔다가, 막판에 어렵사리 합의에 성공했다. 이혼 후에도 남편과 좋은 친구로 지내겠다는 제이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애초에 그런 희망을 품지 말았어야 했다. 혹시 여자 문제였다면 이혼까지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린년과 딴 집 살림을 차린 게 아니라면 “사내자식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통 크게 넘길 수도 있었다. 사실 제이의 남편에게 여자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필드에 나갔다 오는 날이면 제이는 남편에게서 야릇한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골프장 클럽 하우스의 싸구려 로션과 스킨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날 파출부가 부친상을 당해 며칠 동안 빨래가 밀렸다. 제이는 세탁기를 돌리려고 빨랫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남편 팬티에 들러붙어 있는 노랗고 긴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그날 밤 남편과 대판 싸운 제이는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칠칠맞지 못한 새끼. 그딴 걸 왜 들켜?”
제이의 성격에 한 번 의심이 들자 이제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제이는 남편이 술이라도 마시고 오는 날이면 팬티 검사를 했다. 남편이 팬티를 벗지 않겠다고 버티면 “너 이 새끼 어디서 누구랑 하고 왔어?” 하고 다그쳤다. 그리고 시댁에 알리겠다며 수화기를 들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이가 이혼을 결심한 결정적 사건은 남편의 몰래 카메라 때문이었다. 지난겨울 제이가 전화로 하소연을 했다.
“이 미친 새끼가 나랑 하는 걸 모두 찍어 놨어. 게다가 딴 년이랑 하는 것도 있어.”
밤마다 남편이 서재에만 들어가면 안에서 문을 잠그는 게 마음에 걸려 하루는 남편 컴퓨터를 샅샅이 뒤졌다. 컴퓨터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꼼꼼한 남편 성격을 아는 제이는 서재의 책들을 한 권씩 살펴보다가 감춰진 소형 노트북을 하나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 양반이 밤마다 나 몰래 포르노를?” 하고 피식 웃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너 이혼할 거야?”
“응……. 아니 모르겠어.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이혼해야겠지?”
제이는 많은 점에서 서툴렀다. 어떤 때는 똑 부러지다가도, 어떤 때는 바보 같았다. 이혼을 하자고 마음을 먹자니 딸아이가 가장 골칫거리였다. 제이는 아이를 키울 만한 능력이 없었고, 설사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키울 생각이 없었다. 딸아이는 언제나 아빠 편이었다.
“그건 나중에 고민하고 일단 복사부터 해 둬.”
“어떻게 하는데?”
“몰라? 그럼 당장 노트북 들고 내 커피숍으로 와.”
“거긴 왜?”
“넌 복사할 줄 모른다며. 시간 끌지 말고 당장 와.”
나는 제이에게 우리 집 강아지 몽이의 목숨을 걸고 백업한 동영상을 절대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참 이상하게도 나도 나를 안 믿고 내 아내도 나를 안 믿고 우리 부모님도 나를 안 믿는데, 제이는 언제나 내 말을 잘 믿어 주었다. 그날 밤, 제이와 남편 사이에 있었던 입에 담기 힘든 폭언들, 골프채에 박살난 노트북, 이웃들의 신고와 출동한 경찰들 앞에서 벌인 싸움 등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백업해 둔 동영상 때문에 제이의 시댁에서 결국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감옥보다야 합의가 낫지 않겠는가?
시댁에서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던 제이는 오히려 양육권을 더 강하게 주장했다. 남편이 딸아이를 데리고 가는 대신 제이는 두둑한 위자료를 챙겼다. 김포 신도시에 있는 넓은 아파트와 4층짜리 상가 건물을 받아냈다. 주위에서 다들 땡잡았다고 부러워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제이는 유배지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술에 취한 제이가 “차라리 잘 됐어. 이제 아무 미련도 없어. 집에 들어가면 아무도 없는 게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라” 하고 말했을 때, 나는 그게 진심이 아니라 허세라고 생각했다. 술이 들어가면 제이는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술이 깨고 나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기억을 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물론 옛날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랬으면 그랬지.
사실 내 결혼 생활도 끝장나기 일보직전이다. 물론 제이 때문은 아니다. 아내는 나랑 제이의 관계에 별 관심이 없다. 아마 “흥! 네 주제에?”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자 문제가 아니라면 뻔하지 않겠는가. 내 경우는 다들 그렇듯이 돈 때문이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나를 아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노래방, 피시방, 카페 등 손대는 것마다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나마 카페는 권리금을 일부라도 챙기고 순진한 여자에게 넘겼기 망정이지 정말 거덜이 날 뻔했다. 취직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갈 곳이 없었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도 생각해 보았지만 체력 문제도 있고 해서 그만 포기했다. 그건 정말 최악의 경우에 고려할 일이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아내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내가 이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딱 삼 개월만 별거를 해보고, 그래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선선히 물러나겠다고 사정했다. 결국 아내는 동의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누가 밖에서 사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자기가 친정에서 지내겠다고 했다. 나는 제발 친정에는 우리 별거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다시 한 번 사정했다. 그러자 아내는 “당신은 본가 식구들과 의절해서 갈 곳도 없잖아요?” 하고 말했다. 나는 이 아파트 명의가 당신 앞으로 되어 있으니 내가 나가서 지내는 게 당연하다고 우겼다. 그리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밖으로 나왔다. 짐은 세면도구랑 속옷 몇 벌이 전부였다. 나는 아파트 입구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왠지 아내의 전략에 말려든 느낌이었다. 미리 이런 사태를 준비하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에서 카운터펀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는 좀 더 치밀하게 움직이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다시 한 대를 입에 물며 나는 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짓말하지 않겠다. 솔직히 나는 제이가 내게 진 빚도 있고 해서 세 달 동안 제이에게 얹혀살려고 했다. 호텔에서 세 달을 보내자면 지갑에 있는 돈으로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싸구려 모텔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차라리 노숙을 하고 말지 모텔이라니? 더러운 시트, 옆방의 신음소리, 싸구려 냉장고의 팬 돌아가는 소리, 유흥가의 네온사인, 취객들의 고함 소리 등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택시 타고 당장 와.”
“진짜?”
“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눈에 담배 연기가 들어갔나 봐.”
“택시비는?”
“카페 정리할 때 꼬불쳐둔 비상금이 아직 남았어.”
별거 첫날부터 꼬박 두 달 동안 나는 제이의 집에서 방 한 칸을 빌어 살았다. 제이가 내게 아무리 큰 신세를 졌다고 해도 무전취식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밥값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장을 봤다. 그리고 토스트 두 장, 삶은 계란 한 개, 사과 반쪽, 파프리카 사분의 일 쪽, 모닝커피를 준비한 뒤 제이를 깨웠다. 제이는 얼마 만에 먹는 아침식사인지 모르겠다며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우리의 아침 식사는 일상이 되었다. 나는 설거지와 집안 청소도 담당했다. 물론 식기세척기와 로봇 청소기의 도움을 받았다. 제이가 빨래만큼은 각자 해결하자고 했지만 나는 한집에 사는 식구끼리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일주일에 한 번씩 세탁기를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왜 진작 우리 집에서 이런 일들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내가 그렇게 집안일 좀 도와달라고 했을 때 왜 만날 딴청만 피우고 도망을 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식기세척기와 로봇 청소기만 있으면 하나도 어렵지 않은데 말이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부터 집안일은 모두 내가 담당하겠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아내도 나에 대한 화를 풀고 함께 살자고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아내는 내가 변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신 아내는 서류를 준비했으니 집으로 오지 말고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정말이지 나는 제이처럼 이혼이나 이혼 소송은 꿈도 꾸기 싫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아내는 전화를 걸어 심하게 다그쳤다. 그리고 다시 약속을 잡았는데 역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에게서 도망쳐 버렸다. 좀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달리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두 번째 약속을 어긴 날 밤 제이랑 텔레비전에서 유럽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데, 제이가 죽기 전에 파리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럼 나랑 가자” 하고 호기롭게 말해 버렸다. 그때 나는 조금 술에 취해 있었다. 제이 역시 상당히 취해 있었다. 이튿날 내가 아무래도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며 다음에 꼭 함께 파리에 가자고 했을 때, 제이는 그렇게는 절대 안 된다며 그럴 거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고 억지를 부렸다. 결국 제이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혼 문제는 유럽 여행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큰일을 앞두고 괜한 골칫거리를 마음속에 담아둘 필요가 있겠는가. 비수기라서 그런지 파리행 항공권 두 장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숙소는 파리에 도착하면 오페라 극장 근처의 아무 호텔이나 잡기로 했다. 제이는 항공권 예매가 끝나자마자 유럽에 입고 갈 옷을 산다며 쇼핑하러 나갔다.
인천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받지 않았다. 면세점에서 담배를 사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 버렸다. 아내는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아내는 나의 이런 태도를 참을 수 없다며 결혼 생활 내내 수없이 많은 짜증을 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과 이혼할 수 없기 때문에 여자 친구랑 파리로 도망간다고?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하지만 내 사정을 알고 나면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첫째, 아내는 삼 개월 동안 별거를 하기로 해 놓고서는 불과 두 달만에 이혼 서류를 내밀려고 했다. 이것은 명백한 계약 위반이다. 둘째, 아내는 내가 집밖에서 지내는 두 달 동안 단 한 번도 먼저 안부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옥 같이 귀한 서방님을 너무 홀대하는 것 같다. 셋째, 이것은 제이의 사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밝혀야겠다. 사실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제이랑 단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물론 그전에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제이의 손목조차 잡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정말 순수하게 친구 관계일 뿐이다. 세상의 속물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플라토닉 러브란 말이다. 일단 이 세 가지만 봐도 나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죄인 아니겠는가? 내가 공항에서 전화를 받지 않은 것도 결국 아내의 자업자득이다. 갑자기 속이 다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서 파리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나는 예전에 파리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대학 시절 남들처럼 파리, 런던,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도시를 보름 정도 돌아다녔다. 물론 혼자 여행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여행사의 패키지 투어로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 외국에 나간다는 건 왠지 내키지 않는다.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발목이라도 삐거나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란 말인가. 병원에 가면 된다고? 그래 좋다. 이거야 병원에 가면 해결된다고 치자. 그런데 만약 로마의 지하철에서 소매치기에게 전 재산을 털리거나, 파리의 뒷골목에서 강도라도 만나면 어쩌란 말인가. 정말 이런 건 생각하기도 싫다. 사람들은 내게 사내자식이 배짱도 없다고 욕을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원래 그런 놈이다. 나는 소매치기나 강도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생길 골치 아픈 일들이 두렵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다.
무슨 거창한 여행 계획을 짜고 파리에 온 건 아니었다. 제이와 나는 남들처럼 에펠탑에 오르고 개선문을 바라보며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여행 책에 나온 성당도 몇 군데 들렀다. 성당은 아무리 구경해도 성당일 뿐이었다. 한국의 절간이 아무리 멋있다 한들 절간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노천카페에서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멋들어지게 담배를 피웠다. 산보를 하다가 배가 출출하면 근사한 빵집에 들어가 향긋한 프랑스 빵도 실컷 먹었다. 단팥빵인 줄 알고 샀던 빵에 초콜릿이 잔뜩 들어 있어서 잠시 기분이 상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즐거운 날이 계속되었다. 파리에 오니 삶이 활동적으로 변했다. 우리는 매일 걷고 또 걸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아내의 수입만으로 먹고사는데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들처럼 직장이라도 꾸준히 참고 다녔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텐데. 나는 직장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선천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지극히 평범한 체질이다. 불행히도 사업적인 안목이나 수완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할 게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아내의 말도 어찌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솔직히 남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결코 내 잘못만은 아니다. 아무래도 운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비난 받을 일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지만 좋은 의도로 일을 벌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카페를 창업했을 때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장사가 잘 됐다. 하지만 몇 달 뒤 거의 모든 건물의 일층에 카페가 들어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름을 다 외우기 힘들 정도로 많은 대기업 프랜차이즈에서 죽자 사자 덤비는데 나로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은퇴자들이 퇴직금이나 전 재산을 몽땅 털어 넣고 달려드는데 나처럼 고상하게 음악도 듣고 커피도 마시며 한가하게 장사를 하려던 선량한 사람이 무슨 수로 당해내겠는가. 만약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갈 줄 알았다면 애당초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손해를 크게 보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카페를 정리하자 아내는 곧바로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결혼도 아니고 별거도 아니고 이혼도 아닌 어정쩡한 우리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내에게 딴 남자라도 생겼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 남자가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나는 쉽게 이혼에 합의했을지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것도 사실 거품이 꺼지고 나면 김빠진 맥주랑 별반 차이가 없다.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만날 때는 모든 게 좋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 좋은 감정도 무뎌지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치약 뚜껑 때문에도 이혼을 하겠는가.
아내도 알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나도 아내에게 불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아내가 펜을 잡을 때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다. 찻잔을 들 때도 꼭 새끼손가락을 치켜든다. 옛날에는 그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새끼손가락만 보면 미칠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아무런 이유가 없듯이 싫은 데에도 이유 따위는 없다. 하여간 내 인생에서 마음대로 된 건 하나도 없다. 역시 운이 없었던 것 같다.
제이와의 파리 여행은 모든 게 순조로웠다.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면 그건 잠자리였다. 오페라 극장 근처의 제법 근사한 호텔들에는 빈 방이 하나도 없었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 때문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맞은편 호텔에 다행히 빈 방이 딱 하나 남아 있었는데 아쉽게도 트윈 룸이 아니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숙소를 잡던지 아니면 제이와 한 침대에서 자던지 결정을 해야만 했다. 내가 차라리 민박집이나 호스텔을 잡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이에게 물었더니, 제이는 팔짱을 끼고 따지듯이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머쓱해서 “아니, 무슨 비수기에 한가하게 여행하는 인간들이 이렇게 많아” 하고 투덜거렸다.
결국 파리에서는 내가 침대에서 자고 제이가 카펫 위에 이불을 깔고 잤다. 나는 어릴 적부터 침대가 아니면 한숨도 못 자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제이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제이에게 그러지 말고 외곽으로 호텔을 옮기자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제이는 듣지 않았다. 자기는 침대 밑에서 자도 괜찮다는데 어쩌겠는가? 나야 따를 수밖에. 어쩌면 제이는 내심 내가 옆에서 같이 자자고 말해 주기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안 될 말이다. 나는 한 침대에서 잘 만큼 제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중학교 때부터 알아 온 말동무고 오래된 술친구일 뿐이다. 아마 제이도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해서 제이에게 여성적인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실은 그 반대다. 제이는 찬찬히 뜯어보지 않으면 삼십 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눈가나 목에 주름도 거의 없다. 피부도 그 정도면 깨끗해서 쥐젖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하나도 없다. 한 침대에서 잔다고 꼭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울에 있는 아내 생각을 하면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나중에 와이프가 제이랑 파리에서 뭐했냐고 물어 보면 당당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제이랑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이다. 그러면 아내가 나를 얼마나 기특해 하겠는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제이가 침대 밑에서 잔 건 모두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버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잠자리 문제가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여기도 중국인 관광객 때문에 호텔마다 빈 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운 좋게 예약이 막 취소된 트윈 룸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테라스까지 딸린 멋진 방이었다. 나는 더블베드를 제이에게 양보하고 싱글베드 위에 내 짐을 풀었다. 신사로서 이 정도는 양보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숙소가 아무리 좋다한들 암스테르담에는 볼 게 별로 없었다. 운하도 시시했고 유명하다는 꽃 시장은 꽃향기 때문에 머리만 아팠다. 고흐미술관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 때문에 너무 붐벼서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림 따위나 보려고 유럽에 온 건 아니었다. 안네 프랑크의 집은 필수 코스라고 여행 책에 나와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그저 발길 닫는 데로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았다. 제이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딱히 어디를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히 발견한 데카르트의 집 앞에서 제이에게 잠깐 잘난 체한 게 그나마 좋은 추억 거리가 되었다.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는데, 여기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불온한 저서 때문에 수십 번을 이사하며 평생 동안 숨어 살았다고 했다. 아마 그 집도 그의 은신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제이에게 이런 내용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대기업 입사시험에 응시를 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나온 시험문제 중에 칸트의 주요 저작 세 권을 쓰라는 게 있었다. 나는 《순수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은 괄호 안에 썼지만 《판단력 비판》은 결국 빈칸으로 두어야 했다. 물론 내가 이 문제를 틀리는 바람에 지금 그 대기업의 부장이나 이사 직함을 달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만 놓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졌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건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내가 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제이는 “철학과 맞아?” 하고 킬킬대며 웃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아직도 대학 동창생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다. 지금도 “그 누구냐? 판단력비판 있잖아” 하면 곧바로 나를 떠올린다고 한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집 앞에서 잠시 서성거리다가 중앙역 근처의 호텔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길을 잘못 들어 홍등가와 마리화나를 파는 커피숍 앞을 지나게 되었다. 거리에서 매캐하지만 구수한 냄새가 났다.
“이거 마리화나 냄새지?” 제이가 말했다.
“그러지 않을까. 담배 냄새는 확실히 아니네. 암스테르담에서는 커피숍에서 마리화나를 피울 수 있다고 하더라.”
“우리도 한 대 피워 볼까?”
“미쳤어? 절대 안 돼.”
내가 매정하게 딱 잘라 말해서 그런지 제이도 더 이상 마리화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날이 쌀쌀해서 호텔에 잠시 들러 외투를 걸치고 나와 저녁 식사를 했다. 파리에서 누렸던 혀의 호사에 비해서 암스테르담에는 먹을 게 별로 없었다. 그저 모든 게 비싸기만 했다. 우리는 대충 식사를 마치고 술집에 들어가 맥주를 마셨다. 네덜란드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맥주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종류별로 한 잔씩 마시자는 제이의 말에 나는 주저 없이 동의했다. 자정쯤 우리는 비틀거리며 호텔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나는 열 시가 넘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면도를 했더니 기분이 나아졌다. 욕실에서 나왔더니 제이는 아직도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제이를 부르며 어깨를 흔들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가 다시 흔들자 슬립의 가느다란 끈이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그러자 슬립 안에 숨어 있던 오뚝한 젖꼭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야. 그만 일어나.”
제이는 머리가 아프다며 잠시만 내버려 두라고 했다. 나는 제이의 젖꼭지가 보이지 않도록 이불을 살짝 덮어 주고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그리고 중앙역에서 커피와 크루아상을 산 후 호텔로 돌아왔다. 제이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나는 로비에서 기다리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호텔 로비의 창가 쪽 소파에 앉아 제이를 기다리는데 프런트 직원이 일본어로 쓰인 신문을 내밀었다. 나는 일본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중국어로 무슨 말을 건넸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영어로 사과를 했다. 제이가 로비로 걸어 내려왔다. 내가 조금 식은 커피를 제이에게 내밀었다.
“오늘은 어디 갈까?” 내가 말했다.
“치즈나 나막신 구경만 아니면 돼. 어제 꽃구경 갔다가 실패했잖아.”
“그럼, 헤이그 어때?”
“헤이그?”
“응. 헤이그.”
“이준 열사의 헤이그?”
“응. 그 헤이그.”
“거기 뭐가 있는데?” 제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몰라. 그냥 한 번 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너나 나나 한국 사람인데.”
“그럼, 가지 뭐.”
헤이그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열차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도시는 놀라우리만치 깨끗했다. 매캐한 마리화나 냄새가 풍기는 암스테르담과는 딴판이었다. 제이와 나는 헤이그 중앙역 근처의 식당에 들어가 가볍게 점심을 먹고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향했다. 헤이그 중앙역에서 도보로 십 분이면 충분했는데 도중에 길을 잃어 한참을 헤맸다. 게다가 멀쩡한 하늘에서 난데없이 소나기까지 퍼붓는 바람에 작은 접이식 우산도 사야 했다. 내가 우산을 두 개 사자고 했지만 제이는 한 번 쓰고 버릴 건데 뭐 하러 돈 낭비하느냐며 우산을 하나만 사게 했다. 사실 조금 짜증이 났다. 그래도 나는 제이가 원하는 대로 따랐다. 파리에서 내게 침대를 양보했던 게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조그만 접이식 우산으로 소나기를 막는 건 역부족이었다. 제이가 내게 몸을 밀착하며 팔짱을 꼈는데도 이상하게 제이의 외투만 흠뻑 젖고 말았다.
이준 열사 기념관에는 관광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너무 숙연한 분위기 때문인지 마음이 무거워져서 십 분만에 나와 버렸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헤이그의 거리를 산책했다. 비가 잦아들기는 했지만 우산 없이 걷기에는 빗줄기가 여전히 굵었다. 거리는 한적했다. 날씨 때문인지 한참을 걸어도 사람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 데서 살면 좋겠네.” 제이가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오늘 아침 제이의 젖꼭지를 훔쳐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 이렇게 제이와 팔짱을 끼고 한 우산 아래에서 걷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내가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이 든 건 인천공항에서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고 휴대폰을 꺼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번 여행 기간 내내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쯤 아내는 화가 많이 풀렸겠지만, 다음에 만나면 또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아내의 모습은 정말 보고 싶지 않다. 아내가 상스런 말을 내뱉는 것도 듣기 싫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내가 나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제이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제이도 무슨 딴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 침울한 표정이었다. 하늘마저 거무튀튀해서 더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 가서 맥주나 한 잔 마실까?” 내가 말했다.
“이 시간에?”
“날씨도 이 모양인데 조금 일찍 마시면 어때.”
“막차가 몇 신데?”
“몰라. 하지만 막차가 끊기기 전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야지.”
“그럼. 간단하게 한 잔만 할까?”
제이와 나는 헤이그 중앙역 근처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을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술집에는 손님들이 제법 많았다. 우리는 네덜란드산 맥주를 두 잔 시켜서 홀짝거리며 마셨다.
“서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까?” 제이가 두 손으로 맥주잔을 부비며 말했다.
“왜?”
“몰라. 그냥.”
“그럼 런던으로 바로 가지 말고 로마도 들를까? 밀라노랑 피렌체도 구경하고. 비행기 표는 다른 날로 바꾸면 되니까.”
“그럴까? 아냐. 조금만 더 신중히 생각해 보자. 빨리 런던에 가서 뮤지컬도 하나 보고 싶거든.”
“그래. 그럼, 천천히 생각하지 뭐.”
“차라리 잘 됐어. 이제 아무 미련도 없어”
“뭐가?”
“뭐긴. 이혼한 거 말이야. 헤어져 버리고 나니까 이렇게 홀가분할 줄 몰랐어.”
나는 제이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아내보다 제이를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 거짓말 같아?”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멋지게 변신할 거야. 서울에 가면 다시 수영을 시작하고 피트니스 클럽에도 나갈 거야. 제왕절개 흉터만 없애 버리면 정말 좋을 텐데. 내 건 너무 커서 완전히 없앨 수는 없대.” 제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난 아직 젊고 충분히 매력이 있잖아. 안 그래? 멋진 남자도 만나야지. 그 남자와 사랑은 하겠지만 결혼은 하지 않을래. 성악도 다시 시작할 거야. 예술의 전당 무대에 다시 한 번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근데 조금 전에는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내가 언제?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난 서울로 돌아가면 나를 사랑할 거야. 그 누구보다도 말이야.”
“그럼. 넌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근데 우리 한 잔 더 할래?”
“좋아. 대신 딱 한 잔만.”
나는 맥주를 두 잔 더 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두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취기가 올랐다. 나는 서울로 돌아가면 반드시 술을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담배도 끊을 생각이다. 아내에게 내가 변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줄 테다. 아내는 나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겠지. 아니, 어쩌면 나를 다시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사십 대인데 아내에게 버림받으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건 죽음과 다를 바가 없다. 아내에게 이 사실을 확실히 알려 주어야겠다. 내게 이혼은 곧 죽음이라고 말이다. 나는 맥주를 두 잔 더 주문했다. 술과 담배는 서울에 가면 반드시 끊을 생각이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옆 테이블에 배낭여행객 두 명이 자리를 잡았다. 녀석들이 움직일 때마다 매캐한 마리화나 냄새가 풍겼다.
“어떤 기분일까?” 제이가 말했다.
“뭐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듣니?”
“뭐긴? 넌 마리화나 냄새 안 나? 쟤들 움직일 때마다 상한 고등어 먹고 뀌는 방귀 냄새 같은 게 나잖아.”
“별거 있겠어. 담배보다 조금 독하겠지.”
“우리도 마리화나 한 대만 피워 보면 안 될까?”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여긴 마리화나 안 파나?”
“마리화나는 술집에서 안 팔아. 커피숍에서만 판대. 술 마시며 마리화나까지 피우면 뿅 간대.”
“정말? 진짜 한 대만 피워 보자.”
“안 돼.”
“너, 아침에 내 가슴 훔쳐봤지? 내가 모를 줄 알고.”
“…….”
“서울에 가면 미현이에게 다 일러바친다.”
“…….”
“아, 마리화나 한 대만 피우고 나면 누가 내 젖꼭지 훔쳐본 거 모두 잊어버릴 텐데.”
“그럼. 딱 한 대만이다.”
“응. 한 대면 충분해.”
“그럼,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피우자. 혹시 여기에서 피우다 사고라도 나면 귀찮으니까. 어때?”
“너 약속 안 지키면 미현이에게 다 말해 버릴 거야.”
“알았어. 그러니 제발 미현이 이야기는 꺼내지 마.”
우리는 곧장 헤이그 중앙역으로 가서 암스테르담행 열차를 탔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도착하자마자 호텔 근처의 커피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편안한 소파와 포근한 분위기가 긴장을 풀게 만들었다. 제이는 헤이그에서 마신 맥주의 취기가 채 가시지 않아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웨이터를 향해 손짓을 했다. 웨이터는 우리 테이블로 오더니 나와 제이에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설픈 영어로 마리화나를 살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마리화나 전용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펼치더니, 마리화나의 종류와 강도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중에서 크리슈나라는 이름의 마리화나가 눈에 확 띄었다. 나는 그것이 인도의 신, 크리슈나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크리슈나를 달라고 하자 웨이터는 그게 가장 센 거라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무조건 크리슈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카운터에서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스테레오에서 시디를 바꾸고 있었다. 조용한 피아노 트리오의 연주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웨이터가 마리화나를 우리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제이는 나를 보고 함박 웃으며 윙크를 했다. 나는 신중하게 마리화나를 한 대 말았다. 그리고 다시 한 대를 더 말았다. 제이는 두 손을 비비며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큼지막하게 두 대를 모두 말고 난 후 제이에게 한 대를 내밀었다. 제이가 입에 침을 묻히더니 마리화나를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제이가 한 모금 깊게 들이마셨다. 나도 내 마리화나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았다.
“무슨 맛이 이래?” 제이가 컥컥대며 말했다.
“마리화나 피우고 뿅 갔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네. 이거 담배보다 순한데.”
“앵. 완전히 속았어.”
“그러게. 왜 이 비싼 걸 피우겠다고 해서 말이야. 돈 아까워.”
“미안해. 괜한 고집을 피워서.”
우리는 손에 들고 있던 마리화나를 마저 피웠다. 하지만 그걸 다 피울 때까지도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마리화나에서 묵은 삼베 이불 냄새가 났다. 입안이 텁텁해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내내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그런데 있잖아, 우리, 모레, 런던으로 가기로 했어, 바르셀로나로 가기로 했어? 아니, 로마라고 했었나?” 제이가 말했다.
“런던에 가서 뮤지컬이나 한 편 볼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나 레미제라블 어때?”
“그런 건 너무 칙칙하잖아. 다른 건 없어?”
“시카고나 맘마 미아는?”
“맘마 미아로 하자.”
“그러지 뭐.”
“그리고 또 뭐 해?”
“몰라. 가면 알겠지. 근데 여기서 왜 이 음악이 나오지?” 내가 스피커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음악?”
“이 음악 몰라? 이태원의 솔개잖아. 근데 좀 이상하다. 오리지널 음반인가 봐. 잠깐만.”
나는 두 눈을 감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이태원의 솔개가 분명했다.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기분이었다. 마치 솔개가 되어 날아다니는 황홀한 느낌이었다. 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태원의 솔개를 흥얼거렸다.
“들었어?” 내가 말했다.
“뭘?”
“이 노래 말이야. 이태원의 솔개잖아. 솔개는 이절에서 ‘나를 비웃고’가 ‘나를 보면서’로 바뀌었어. 삼절에서는 ‘의미 없는 하루’가 ‘의미 있는 하루’로 바뀌고 말이야. 군부독재 시절에 검열한답시고 원곡의 가사를 지들 맘대로 바꿨어. 썩을 놈들. 암스테르담에서 솔개의 원곡을 들을 줄이야. 신기하지 않니? 혹시 여기 매니저가 한국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 아냐?”
“야, 너, 왜 그래?” 제이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뭘?”
“바보야. 이 노래는 이태원의 솔개가 아니야.”
“그럼 뭔데?”
“송대관의 해뜰날이잖아. 자세히 들어 봐.”
그러더니 제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송대관의 해뜰날을 부르기 시작했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그러고 보니 스피커에서는 이태원의 솔개가 아니라 송대관의 해뜰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흥겨운 리듬 때문에 나까지 어깨가 들썩거렸다.
“야. 잠깐, 잠깐만.” 내가 제이를 불렀다.
“왜?”
내가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같이 부르자고.”
제이와 나는 마리화나에 흠뻑 취해 송대관의 해뜰날을 신나게 불렀다. 제이는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까지 꺼내 마이크처럼 손에 쥐고 송대관 흉내를 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해맑게 웃는 제이가 예뻐 보였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웨이터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여기서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피숍 안의 사람들은 의자까지 돌려 앉아 낄낄대며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구석 테이블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던 젊은이들은 우리를 향해 박수까지 쳐댔다.
나는 제이의 팔목을 잡고 자리에 앉히려 했다. 그러자 제이가 내 손을 뿌리치며 “왜?” 하고 소리쳤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제이를 바라보았다. 제이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휴, 쪽팔려.” 제이가 말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 갈까?”
“벌써?”
제이가 새침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제이의 귀여운 입술을 보자 오늘 아침에 훔쳐보았던 분홍빛 젖꼭지가 떠올랐다. 나는 내 귓불을 세게 꼬집었다.
“한 대만 더 피우자. 작게 하나만 더 말아 봐.” 제이가 말했다.
“이제 그만하자.”
“남은 건 어떡하고?”
“버리지 뭐.”
“이 비싼 걸 왜 버려. 그러지 말고 한 대만 더 피우면 안 돼?” 제이가 코맹맹이 소리로 아양을 떨며 말했다.
“그럼 호텔로 돌아가서 피우자.”
“난 지금 한 대 더 피우고 싶은 걸. 아직 네가 내 젖꼭지 훔쳐본 기억이 말끔히 지워지지 않았단 말이야. 응, 딱 한 대만 더 피우자.”
나는 잠시 망설였다. 물론 나도 한 대 더 피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리 방에는 발코니도 있으니 거기서 피우면 아무도 모를 거야. 그럼 되잖아.”
“좋아. 그럼. 마리화나는 호텔에 가서 마음 편하게 피우지 뭐. 너, 분명히 약속했어.”
“그래. 그래.”
제이와 나는 조용히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제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중학생 때는 네가 나보다 작았는데. 넌 고등학교에 들어가더니 갑자기 키가 자라더라.”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너, 혹시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 살았던 셰퍼드 기억나? 가끔 목줄도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렸잖아.”
“나경수 교장 집에서 기르던 사나운 셰퍼드? 물론 기억나지. 밤마다 늑대처럼 얼마나 짖어댔는데. 그 집 아들네미의 성질이 그 셰퍼드처럼 아주 더러웠어.”
“기억하는구나. 한 번은 하굣길에 그 셰퍼드가 나에게 달려들었는데, 네가 그 작은 체구로 내 앞에 서서 그 개를 막아줬어.”
“그런 일이 있었나?”
“네가 무섭게 저리 가! 저리 가! 하고 소리치니까 셰퍼드가 당황해서 움찔움찔하며 물러났어. 그때 그 개에게 목이라도 물렸으면 난 죽었을 텐데.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이잖아. 정말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는데. 왜?”
“바보. 그럼 됐어. 김포에 있는 상가 건물이 골칫거리야.”
“신축인데 무슨 골칫거리?”
“건물 관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주위에 좀 알아 봐. 아니면 취업 사이트에 구인 공고를 내든가. 그게 제일 빨라.”
“서울에 가면 미현이랑 정말 이혼할 거야?”
“아니. 왜 이혼을 해? 안 할 건데.”
“이제 곧 별거 기간도 끝난다며.”
“그래도 그럴 순 없어. 미현이도 나 없이는 못 살 걸.”
“그건 네 생각이지?”
“아냐. 미현이도 같은 생각일 거야. 우린 잠시 서로 떨어져 상황을 냉정히 바라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난 귀국하면 술도 끊고 담배도 끊을 건데. 분명히 미현이도 이런 나를 보면 반가워할 거야.”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이미 끝장나 버렸다는 것을.
오늘 밤 제이는 마리화나에 취해 나를 유혹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내가 먼저 제이를 유혹할지도 모르겠다. 제이의 귀여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분홍빛이 도는 젖꼭지를 한 번 빨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제이와 섹스를 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는 내가 파리와 암스테르담에서는 물론 런던에서도 제이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나를 대견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나는 나를 배신한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아내를 배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여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 볼 생각이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나지막이 솔개를 흥얼거렸다.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
아홉 시가 넘었는데도 하늘은 아직 환했다. 나는 그게 위도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끝-